의사인 저도 약 챙겨 먹기 힘듭니다. — 환자순응도의 현실

💡이 글의 핵심

– 의사도 약 챙겨 먹기 어렵습니다.
– 환자순응도가 낮으면 응급실에서 이런 일이 생깁니다.
– 완벽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그냥” 한 마디

블로그를 시작하고 의학 주제로 첫 글을 응급의학과 의사답게
흉통이나 무시무시한 응급 질환으로 시작하고 싶었으나, 최근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는 것이 더 현실감 있고 내용도
알차게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첫 주제로 환자순응도를 골랐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손가락을 다치셔서
응급실에서 봉합을 받으셨습니다. 봉합 후 항생제와 소염진통제를
처방받으셨는데, 아들인 저에게 약 먹기 싫다며 안 먹으면 안 되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당연히 감염 예방을 위해 복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으나,
아버지는 그냥 먹기 싫다며 고집을 부리셨습니다. 도대체 왜
먹기 싫으시냐고 여쭤보니 돌아온 대답은 딱 한 마디, “그냥.”

아버지이시니 한 번 더 꾹 참고 “상처가 잘 낫도록 약을 드셔야
하니, 싫으셔도 드세요” 하고 설득해서 겨우 복용시켰습니다.
만약 제가 진료하는 환자분이 이런 상황이었다면, 한두 번
설득해보겠지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약 복용을 거부하는 환자순응도 문제를 보여주는 알약 이미지

의사인 저도 약을 잊습니다.

사실 여기서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저도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약들이 있는데 꼬박꼬박 제때 챙겨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특성상 교대 근무를 하다 보니 밤낮이 뒤바뀌고,
만성 수면 부족으로 인한 기억력 저하로 단기 기억이 쉽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침약을 먹었는지 저녁약을 먹었는지 헷갈려서 쓰레기통의
약봉지를 다시 찾아본 적도 있고, 비타민은 먹었는지 헷갈려서
한 알을 더 복용한 적도 있습니다.
의사인 저도 이런데, 환자분들은 오죽할까요?

응급실에서 본 환자순응도의 현실

응급실에 오는 환자분들은 다양하지만, 약물 복용·외래 경과 관찰·
생활 습관 교정 등 환자순응도가 낮아서 발생한 상황으로 오시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 질환은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데,
“약을 오래 먹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혈압·혈당이 괜찮아져서
약을 끊어도 되는 줄 알았다”, “바빠서 외래를 한 번 놓쳤더니
그냥 안 먹게 됐다” 등의 이유로 복용을 중단한 뒤 수축기 혈압이
200mmHg 이상, 혈당이 500mg/dL 이상으로 응급실을 찾으시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고혈압 관리를 소홀히 하면 뇌출혈이나 대동맥박리 같은 위험한
응급 질환이 생길 수 있고, 당뇨 관리를 하지 않으면 당뇨병성
케톤산증, 무통성 심근경색, 급성 신부전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열상이나 화상 같은 외상의 경우, 피부의 보호 기능이 손상되어
감염에 취약한 상태인데도 항생제를 복용하지 않거나 드레싱 교체 및
외래 추적 관찰을 하지 않아 감염이 악화되어, 통원 치료로 나을
것을 입원 치료까지 이어지는 상황도 종종 있습니다.

왜 환자들은 약을 안 먹을까요?

그렇다면 왜 환자들은 약을 안 먹고, 병원에 오지 않는 걸까요?
제가 응급실에서 직접 들어온 이유들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안일함입니다.
증상이 없으면 병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혈압이 ‘침묵의
살인자’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증상이 없어도
혈관은 조용히 망가지고 있습니다. 응급실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요즘 혈압이 괜찮던데요”인데,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의
혈압이 200mmHg를 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둘째, “약을 오래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혈압약이나 당뇨약을
임의로 끊었을 때 생기는 결과가 약의 부작용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뇌출혈, 대동맥박리, 당뇨병성 케톤산증 —
이것들은 응급실에서 가장 긴박하게 다루는 질환들입니다.

셋째, 단순히 바쁜 일상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사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약 먹는 게 귀찮고, 외래 예약 잡는 게 번거롭고, 한 번 놓치니
그냥 포기하게 됩니다. 이걸 게으름이라고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약을 먹기 싫은 마음, 병원 가기 귀찮은 마음 —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면, 그 귀찮음을 미루다가 결국 훨씬
더 힘든 상황으로 오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뇌출혈로 편마비가 오신 분, DKA로 중환자실에 가신 분,
손가락 감염이 손 전체로 퍼져 입원하신 분.

모두 처음엔 작은 것 하나를 지키지 않아서 시작된 경우였습니다.

완벽하게 챙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오늘 약 챙겨 먹겠습니다. 😊


📚 References
– Vrijens B, et al. “A new taxonomy for describing and defining adherence to medications.” Br J Clin Pharmacol. 2012.
– WHO. “Adherence to Long-term Therapies: Evidence for Action.” 2003.
– 대한고혈압학회 진료지침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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